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헬무트 콜 (문단 편집) == 기타 == * [[투머치토커]] 기질이 있던 걸로 당대 유럽각국 정상사이에서 유명했는데, 특히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가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어찌나 콜에게서 많은 전화를 받았던지, 훗날 메이저는 "꼭 중요한 일이 없더라도 콜에게서 전화가 자주 온다는걸 총리직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여러모로 가정사가 불행하다. 상술했듯이 그의 형은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소년병으로 참전하여 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물론 이 시절은 아직 콜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이다.] 하넬로레는 12세 때 [[소련군]]에게 강간당한다.[* 어머니와 함께 강간당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로 평생 러시아어와 러시아인에 대한 노이로제에 시달렸다고.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삶을 싫어했던 그녀는 항생제 복용 후유증으로 심한 [[햇빛 알레르기]]를 앓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다만 부인의 자살에 대해서 그 아들 발터 콜은 훗날 "어머니의 자살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것은 1998년 정치비자금 추문 당시 어머니의 절친이었던 [[앙겔라 메르켈]]의 정치적 배신 때문"(콜을 사실상 당에서 추방)이라고 얘기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2/23/0200000000AKR20170223158100009.HTML?input=1195m|콜 前독일 총리 아들 "어머니 자살은 메르켈 배신 탓 커"]] * 자신의 두 아들과도 의절했다. 2008년 콜은 40세 이상 차이나는 마이케 리히터와 재혼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들들은 아버지의 재혼 사실을 전보로 통보받았으며 결혼식에 초청조차 받지 못했다. 2011년 장남인 발터 콜은 "살아가느냐 아니면 살아지느냐(Leben oder gelebt werden)"라는 자서전을 출판하면서 자신과 부친의 갈등에 대해 밝히는 한편, 아버지 헬무트를 '단 한번도 가정의 의무를 위해 공무를 포기한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기록했다.[* 작은아들 페터 역시 아버지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2011년 5월의 일화를 털어놓았는데, 당시 페터는 딸을 데리고 독일 남서부 오게르샤임의 아버지 집을 찾았다. 리히터가 화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고 콜 전 총리가 있는 거실을 가리켰다. 휠체어에 앉아있던 콜 전 총리는 손녀의 손을 잡고 매우 기뻐했지만 약 10분이 지나자 아들에게 “가는 게 좋겠다”고 속삭였다. 그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또 곤란해질 것”이라고 했다.] 임종의 순간에도 화해하지 못했는데, 발터는 아버지의 별세 후 부친의 자택을 찾았지만 계모인 리히터에게 문전박대를 당했고, 콜의 가족은 슈파이어 성당에서 이뤄진 장례미사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훗날 콜의 여러가지 주요 문서, 메모, 편지, 서류 등 물품의 소유권에 대해서 가족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유언대로 리히터에게 단독 상속받게 하는 대신 전 부인의 아들인 발터 콜과 페터 콜, 그리고 손자들에게 100만 유로(약 13억 3,000만 원)를 주고 상속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 형제들 중에서 처음으로 대학교육을 받았다고 한다.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이와 관련해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학위논문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발터 페터 푹스 교수의 지도로 쓴, "1945년 이후 팔츠에서의 정치적 전개와 정당의 재성립(Die politische Entwicklung in der Pfalz und das Wiedererstehen der Parteien nach 1945)". * 상술한 박사 학위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자가 콜 씨(Herr Kohl)라고 부르자 발끈하면서 "콜 박사(Herr Doktor Kohl)라고 부르세요. '''당신에게 나는 콜 씨가 아니요.(Für Sie bin ich nicht Herr Kohl).''' 나는 당신과 친밀한 사이가 아니잖소."라고 발끈하는 장면은 그가 총리직에서 물러난지 한참이 흐른 지금도 독일에서 자주 회자되곤 한다.[* 독일어권에서는 박사학위 소지자에게 Doktor라는 호칭을 붙여주는게 사회적으로 관례이긴 하다. 콜의 정치적 후계자이자 역시 물리학 박사 소지자인 메르켈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Frau Merkel이 아니라 Frau Doktor Merkel라는 호칭으로 불릴 정도.] [youtube(oINBasa8BXg)] 문제의 호칭으로 인한 콜의 급발진 장면 * '''193cm'''의 신장에 120kg의 몸무게로 상당한 거구이다. 공식적인 몸무게가 120kg이고 아마 실제로는 더 나갈 것으로 추정된다. 총리 재임시절부터 본인이 '''"나의 몸무게는 국가기밀이다."'''라고 셀프디스를 시전하기도 했다. * 거구의 덩치와는 별개로 상당히 어눌한 말투여서, 독일 내에서의 이미지는 좀 모자란 할아버지이다.[* [[헬무트 슈미트|이름은 같았던 전임자]]가 지성인의 이미지가 강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그래서서 그의 멍청함을 디스하는 유머들이 꽤 유행하여 유머집까지 나왔는데, 한국에는 '콜 수상의 웃음'(유재식 편역, 우석출판사, 1985)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면 이렇다. > 콜이 부인과 함께 정원을 치우다 [[수류탄]] 3개를 주웠다. 이걸 경찰에 갖고 가던 중 부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하나가 터지면 어떡하죠?" 잠시 생각하던 콜은 "2개만 주웠다고 하지 뭐"라고 천연덕스레 말했다. > 아프리카의 어느 흑인 국가를 방문한 콜이 학생을 보고 뭘 배우고 있느냐고 물었다. "[[프랑스어]], [[독일어]], [[대수학|대수]]를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학생은 대답했다. "그럼 대수어(語)로는 수상을 뭐라고 하지?"하고 콜은 묻는 것이었다. > 콜이 박사 과정을 위한 대학원 입학 시험을 치를 때의 일화이다. 교수가 그에게 물었다."[[프랑스 혁명]] 이후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어 쿠데타를 감행, 프랑스의 종신통령이자 나중에는 황제가 된 인물은?" 콜은 묵묵부답이었고, 답답해진 교수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러자 갑자기 콜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시험실 밖으로 나갔다. 놀란 교수가 콜에게 왜 나가냐고 묻자 콜의 대답은 "제 뒤에서 대기하는 학생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었나요 교수님?"[* 1990년대 중반까지 쓰였던 국내의 모 고교영어 교과서에도 비슷한 바리에이션이 있다. 여기서는 대답이 '조지 워싱턴'이었다.] > 콜이 아내 한네로네와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갔는데 매표소에서 앞 줄에 선 사람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티켓을 주세요"라고 했다. 그 사람이 가고난 뒤 헬무트의 차례가 오자 그가 말했다. "헬무트와 한네로네의 티켓을 주시오." * 각국 정상들이 만나 오찬이나 만찬을 가질 때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게 대부분인데 반해 이 사람은 자신의 토속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팔츠 요리|지역의 특산 요리]]로 유명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문제는 이 식당이 간 요리, 내장을 사용한 소시지 요리 등의 호불호가 갈리는 요리가 많았기에 그의 초대를 받았던 각국 정상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마거릿 대처]]는 기겁을 했으며, 정치적 파트너나 다름없던 [[프랑수아 미테랑]]이나 [[빌 클린턴]]도 그렇게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유일하게 기뻐하며 즐겁게 식사했던 사람은 [[보리스 옐친]][* 옐친은 [[보드카|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했고, 소시지는 술 안주로 좋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분류:서독 총리]][[분류:독일 총리]][[분류:1930년 출생]][[분류:2017년 사망]][[분류:독일의 가톨릭 신자]][[분류:루트비히스하펜 출신 인물]][[분류:독일 기독교민주연합]][[분류:독일의 남성 정치인]][[분류: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